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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사전/사회탐구

카노사의 굴욕 배경

by 부이쌤91 202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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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습코치 부이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카노사의 굴욕 배경이라는 주제로 고등학교 사회탐구영역 세계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목

 

이번 주제는 2020년 6월 모의고사 8번 문제를 토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동서 교회의 분열, 로마 가톨릭교의 성장, 카노사의 굴욕까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시문

8번 문항에서는 다음 자료를 활용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이라고 출제되었습니다. 지문의 내용을 읽고 이글에 대한 주제 등을 찾으면 되겠습니다.

 

문제

 

내 권위와 온전함을 확신하니,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하인리히 4세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내 그의 왕국을 상실하였음을 선언하노라. 그는 크리스트교로서 준수해야 할 복종을 거부하였고, 신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하였다. 또한, 내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경고를 무시하였다.

 

위의 내용을 통해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대립은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고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성으로 교황에게 사죄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요. 지금부터 서임권을 둘러싼 전쟁으이 과정과 카노사의 굴욕까지 알아보겠습니다.

 

■제시문 단어

하인리히 4세는 살리 왕조가 세 번째로 배출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신성 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과 연장이라고 여겨 로마제국이라 불렀고,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서임권직위 등을 내려 주는 권리로 여기서는 교황의 임명권을 말합니다. 

 

■성상파괴령

성상파괴령은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야훼,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순교자, 성자 등의 성상에 대한 숭배금지를 명한 것을 말합니다. 원래 그리스도교에서는 성화상 숭배가 이단시되었으나, 점차 유행이 되었는데, 교회도 선교의 편의상 묵인했습니다. 

 

성상파괴령

 

레오 3세는 신학상의 이유와 수도원을 억압하기 위해 성상파괴를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국 각지의 교회들이 결속하여 성화상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6세 때 787년의 니케아공의회 결의로, 금지를 풀었으나 813년 즉위한 레오 5세가 재차 금지하고 테오도라가 금지령을 철회하여 끝이 났습니다. 또, 레오 3세가 서방교회에 대해서도 파괴령 실시를 강행하려 하여 로마 교황측의 반발을 일으켜 동서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클뤼니수도원

클뤼니수도원중세의 교회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베네딕토회의 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원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개혁운동의 중심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수도원은 개혁을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나 대를 이어 뛰어난 수도원장들이 부임하여 로마교황이나 봉건제후의 신뢰를 얻어 각지에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개혁 운동이 확대되었습니다.

 

클리뉘수도원

 

이 개혁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봉건제후 등 세속권으로부터의 간섭을 물리친 수도회식 보칙에 토대를 둔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며, 성직매매, 대처, 도사 등에 대하여 당시의 제후들이 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연구 등을 통해 신앙심을 강화하는 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학문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화려한 종교 의식을 중시하여 형식적인 면에 치우졌습니다. 또한, 기증된 토지들을 많이 소유하게 되면서 개혁 정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카노사의 굴욕

10세기 후반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 11세기 이후 교황들도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교황은 사제의 결혼, 성직매매를 금지, 독신생활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개혁 운동에는 군주로부터 성직자 서임권을 가지고 오는 것도 포함이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스 7세가 세속 군주의 서임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면서 황제의 주교직 서임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황제의 권한을 위협하고, 신성로마제국 교회의 붕괴를 가져오는 일이라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 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오스 7세를 폐위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에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선언하였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보름스의 교회에서의 효력이 발휘하지 못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굴복하여 항복문서를 보냈지만 교황은 황제를 불신했습니다. 입지가 약해진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성에 있는 교황을 방문하여 추운 날 맨발로 3일간 서서 굴욕적으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정리

선지

4번을 제외한 나머지 선지들은 전혀 관련없는 내용들입니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추진하였고, 19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선거법의 개정을 통해 선거권을 획득하고자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세기 후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공포 정치를 주도하던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고 총재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또,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가 자영 농민층이 몰락하여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개혁에 나섰습니다.

 

■마치며

지금까지 카노사의 굴욕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는데요. 굴욕을 당한 하인리히는 결국 복수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준만큼 또 돌려받는 신세가 되어 황제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인리히의 실리적인 면이 돋보였지만 그는 언젠가는 물러날 황제였습니다. 지금까지 학습코치 부이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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